추도사
3월 23일은 장모님 소천하신지 3년이 되는 날입니다. 처남내외와 함께 22일 토요일 안동에 있는 선산에 자연장을
하신 장모님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2011년 3월23일 02시 30분경에 장모님께서는 소천을 하셨습니다.
95세까지 장수하신 세월동안 우리 곁에 계신 천사 이셨습니다.
아래 글은 발인 예배때 저가 낭독한 추도사입니다. 목이 메여 한참이나 애를 먹은 추도사입니다.
장모님의 맑고 고운 마음이 그리워서 장모님 생각하며 그때의 추도사를 올립니다.
추도사 (박물관 할머니)
1970년 겨울 방학때 아내와 처남과 함께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생전처음으로
안동군 녹전면 서삼리 336번지에 있는 처가를 방문 한게 장모님을 처음 뵙는 자리였습니다
처음 장모님을 뵈었을때 아내와 너무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가 미안할 정도로
10대 소녀같이 수줍어하시면서 몸둘바를 몰라 하시는 장모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를 사위삼아 주십사고 방문한 처가는 새마을사업으로 지붕을 막 개량했지만 전기도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 였습니다.
장모님께서는 장조모님 모시고 작은 농토에 초인적인 인내와 악착같은 자식사랑으로 아들과 딸 남매를 다 대학에 보낸
마을에서 하나뿐이신 또순이 어머니 셨습니다. 멀쩡한 허우대 외에는 내세울 것 없는 저를 딸이 믿고 소개시킨다는
한가지의 사실만으로 저를 몇점 주시겠습니까라는 짖꿋은 저의 질문에 백점보다 더 높은게 없냐며 장조모님께서 100점을
주셨는데도 120점을 주셨습니다 그 고마움을 못잊어 120점짜리의 사위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살려고 노력을 했는데 지금
장모님께 점수를 여쭐 수 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이 사십에 혼자 되셔서 가로놓인 암담한 현실을 오직성실로 헤쳐 나가시고 시어른 공경에
농사일에서 부터 모든 집안의 일을 혼자서 감당하시며 한푼 이라도 아끼셔서 돈을 만들고
자식 공부시키려는 일념으로 60리 안동장을 이고지고 다니시면서 점심 굶는 것은 기본으로
하시며 살아온 외로운 세월을 남매가 자라는데 온 희망을 삼으시며 사신 장모님 !
외롭고 고단한 삶의 한가닥 희망이셨던 딸은 교육대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아들은
박사로 대학교수로 키우셨으니 장모님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을 움직인 결과 이기도 하십니다.
박물관 할머니란 우리장모님께 제가 붙혀드린 별명입니다
대부분의 어머니 들이 고생을 하시고 자식위해 한평생을 헌신하시지만 저가 못먹는것과
싫어하는 것만 골라하시는 장모님은 천국 박물관에 전시해야 된다면서 저가 붙인 이름이
박물관 할머니입니다 장모님은 1917년 정사년 생이시니 올해 우리나이로 95세가 되십니다
민족의 역사를 바꾸어 놓으신 위대한 박정희 대통령과 동갑이기도 합니다. 그 나이에도
사위인 저를 보면 부끄러워 웃으실때는 소녀 같이 입을 가리시고 웃어십니다.
대구에 이사 오신후부터 아들내외가 다니는 교회에 다니시기를 열심히 하시며
새벽기도부터 하나님앞에 올리신 장모님은 우리믿음의 표본이시기도 하셨습니다.
10여년전부터 딸이 별로 몸이 튼튼치 못하니 와서 도우셨습니다
집안의 일은 혼자서 다 하셨읍니다 집안 청소에서 다림질까지 모두 하셨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위가 하루에 하나씩 벗는 와이셔츠 다리기가 힘이 드셔도 내색도
않으시고 부지런히 하시면서도 사위가 즐겨먹는 음식은 아예 먹지고 못한다고 잡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사위가 생선을 좋아하면 생선은 아예 입에 대지도 않으십니다.
비린내가 싫다는게 장모님 말씀이신데 맛이 없어 버린다고 하면 기어이 잡수시겠다고 해서
딸과 말다툼을 하곤 하십니다.
주일에는 처남이 다니는 교회에 저가 모셔드리면 예배후에 본가에 가셨다가 월요일저녁에는
저가 퇴근 할 때 함께 우리집에 오셨습니다.
과도한 농사일과 집안일 때문에 고생을 하신 것 이 화근이 되어 환갑이 넘자마자 허리가
굽기 시작 하더니 90도로 굽어 셨습니다.
지금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지만 80년대 바삐 돌아가는 직장의 형편들로 인해 마음을
다 쓰지 못한게 천추의 한이 됩니다.
그런데 그때는 지금과 같이 척추만 전문으로 하는 정형외과나 신경외과가 발달되지도 않은것 같았습니다
허리가 굽는구나만 여긴게 지금 생각만 해도 마음 한곳에 저려옴을 느낍니다.
삼 사년전부터 몸이 편치를 못해서 계속해 우리집에 계시면서 교회도 다니시지 못하고
주일은 기독교 TV만 보셨는데 휠체어를 준비해서 다니시자고 해도 남보기 부끄럽다고 사양만 하셨습니다.
그러시다 몇년전 부터는 주일과 수요일엔 저들과 같이 교회에 가시는데 비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가기가
어려워 집에 계셨습니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도 많이 흐려지시고 옛날과 같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치매초기인 것 같아 우리내외가
마음대로 집을 비우질 못했습니다.
친구들로 부터 저녁초대를 받아 나갈땐, 미안하다고 하면 괜찮다고 하시는것을 보면 마음이
놓일때도 있지만, 대부분 서둘러 일찍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만 장모님의 외롭고 쓸쓸한
노후에 얼마나 마음을 다했는지 내가 몇점짜리 사위인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장모님! 무엇이 든지 자식먼저 하기를 원하시고 양보하시는 모습이 우리 모든 자손들의 귀감이 되셨습니다.
해외 여행때는 본가에 모셔 드리고 갈때도 딸은 마음이 편하지 못했고 여행후 여독도 풀리지 않고 모시려 갔을 때,
그렇게 반가와 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짠 함을 느꼈습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다니러오는 아들과 며느리가 어쩌다
행사가 있어서 오질 못하면 마음 조리며 기다리는 모습이 안스럽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건강치를 못하니 본가에 모셔다 드릴까 생각도 했지만 며느리보다 딸이 더 편하실거라며 위안을 삼았는데
잘못 생각 한게 아니길 바라며 나름대로는 아내와 제가 잘 모신다고 장모님과 함께한 세월에 우리내외가
정말 몇점 짜리가 됩니까.
저 보고 120점 짜리라 말씀하시던 장모님의 말씀이 자꾸 귓가에 남아 있습니다. 시간 계념이 점점 희박해지시고 날로
어려워 지셔도 박물관 할머니가 우리와 오래 계시길 하나님께 기도 드렸드랬습니다.
장모님 !!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하늘나라에 갈수 있다고 믿으시던 장모님의 믿음대로 가시는 하늘나라에서
우리 다시 만나 고향 땅 모란에서 제게 주신 점수가 변하지나 않았는지 다시 여쭐 수 있는 날이 올 때 반가운 마음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편히 먼저 가셔서 꿈에 그리시던 장인어른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실 장모님의 마음을 그려봅니다. 이 나그네
세상을 참되고 성실하게 사신 장모님 !
우리 장모님 ! 박물관 할머니 ! 편히 가시길 바랍니다.
2011년 3월 25일 사위 최현득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