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1 2016. 4. 27. 06:28


임진왜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곽재우(郭再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한가로이 시를 읊고 술과 낚시로 세월을 보내던 시골 선비였다.

학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그 인연으로 조식의 외손녀와 혼인했다.

1585년(선조 18)에는 34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응시해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글의 내용이 선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곽재우는 그때 벼슬에 대한 뜻을 접었다.

그런 그가 칼을 들고  세상에 나서게 된 것은 임진년에 수십만 일본 대군이 조선 땅을 유린하며 침략해 왔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무인 출신은 아니었지만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곽재우는 1552년(명종 7)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며,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의 셋째 아들이다. 평생 은거하며 살려고 했던 곽재우에게 전쟁

소식이 전해진 것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에 일본군이 부산포를 점령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곽재우가 살고 있던 의령은 부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또한 한양으로 북상하거나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이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전쟁의 화가 크게

미치는 곳이었다. 그런데 관군(官軍)이 일본군에게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일본군의 점령지가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곽재우는 관군을 믿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 사재를 털어 의병 모으기에 나섰다. 곽재우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설득했다. "적병이 이미 박두했으니 우리의 부모, 처자는 장차 적병의 포로가 될 것이다.

우리 동네에 나이 젊어 싸울 수 있는 자가 수백 명은 될 것이니 만약 마음을 같이 해 정암나루(鼎岩津)에 의거해

지킨다면 우리 고장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것인가."

처음에 곽재우를 따라 모인 병사들은 십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곽재우가 용력 있는 자들을 수소문해 모았다.

그리하여 심대승(沈大升) 등 장사 50여 명이 모여 부대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자 전쟁 초기 흩어졌던 패잔병들도

합세해 제법 세를 이루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천여 명에이르렀다. 이렇게 모인 의병을 이끌고 곽재우는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일본과의 결전에 나섰다.


충의각


의병탑


정암루는 의령의 관문인 정암철교 바로 옆 언덕에 위치한 누각이다. 정암루는 조선시대의 정자 취원루가 있었던

자리에 있는데 취원루는 소실되어 없어졌고 1935년 이 고장 유림과 유지들이 그 자리에 정암루를 건립했다.

정암루 바로 아래가 정암나루가 있던 자리인데, 1592년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이곳에 매복하

있다가 일본군 장수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이끄는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호암 이병철 생가는 삼성그룹의 창업자이자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끈 대표적 기업가인 호암 이병철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1851년 호암선생의 조부께서 대지 면적 1,907㎡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었으며, 호암선생은

유년시절과 결혼하여 분가하기 전까지의 시절을 이 집에서 보냈다.


곽재우 장군의 생가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위치한다.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른 곽재우 의병장의생가를 복원한 건물이다.



백산 안희제는 1885년 8월 4일(음력)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168번지에서 안발(安鏺)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그 후 안희제는

사립흥화학교에서 신문학을 수학하였으며,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가 다음해 양정의숙

경제학과에 재입학하였다. 보성전문학교와 양정의숙 등에서 신문학을 수학하고 민중계몽을 위한 교육구국

운동에 투신하여 1907년 윤상은(尹相殷)과 함께 구명학교(현재 부산구포초등학교 전신)를 설립하여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같은 해 고향인 경남 의령에 의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다음해 1908년에는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전념하였다. 1909년 10월 남형우.서상일.김동삼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

하고 초대단장 남형우에 이어 2대 단장을 지냈다.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안희제는 1911년 러시아와 중국으로 망명하여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지도자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대책을 협의한 결과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 자금조달의 중책을 맡고 귀국하였다. 1914년 부산에서

무역회사인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백산상회는 표면적으로는 해산물과 농수산물을 구매.

위탁하는 무역상이었으나 실은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국내연락망 구축을 위한 국내 독립운동기지였다.



한우산(865m)은 자굴산으로부터 이어지는 맥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골이 깊어 곳곳에 기암괴석이

연출하는 절승이 즐비하며, 가운데 계곡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다. 이 계곡은 여름에도 찬비가 내린다

하여 찰비계곡이라고도 부르며 한우(寒雨)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길이가 3km에 이른다.


철축이 곧 만개할것 같다.


현풍 고령보 부근에서 일몰을 맞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