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2월(고종 32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 박사가 조직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우리나라가 중국·
일본·러시아와 그 밖의 서구열강과 같은 자주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하고, 1896년 7월부터 최초로 전 국민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한
성금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독립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았고 높이14.28m로 45㎝×30㎝ 규격의 백색화강암 1,850여 개로 세워졌다. 중앙에는 아치형의
홍예문 모양으로 되어 있고,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李花)무늬가 방패모양을
한 문양판에 새겨져 있다.내부의 왼쪽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상단에는 ‘독립문’이 한글로 새겨져 있고, 반대편에는 ‘獨立門’이란 한자가 새겨져 있다.
설계는 서재필의 구상아래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도와 세부설계도를 작성하였고,
공사감독은 조선인 심의석(沈宜碩)이 맡았으며, 일은 중국인 노무자를 고용하였다.
독립문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현재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70m 떨어진 독립문 네거리 중간지점에 있었는데,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1979년 12월 31일에
현재 위치로 옮겨 복원하고 옛 자리에는 ‘독립문지’라고 새긴 표지판을 묻어 놓았다.
독립문을 나서면 순국선열기념탑이 아름답게 세워져 있다.
서재필 박사의 동상이 공원 중앙에 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들에게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던 ‘모화관(慕華館)’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1894년 갑오경장 뒤에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가 1897년 5월에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건물을 고치게 되고,
황태자(순종)는 '독립관'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독립협회의 사무실 겸 집회소로 사용하였다.
독립관은 개화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다. 자주독립·민족문화 선양·이권양여
반대·자유언론 신장·신교육 진흥·산업개발 등을 주제로 1898년 말까지 매주 토론회가 개최되었으며, 자주·민권
·자강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시민대중을 계몽하는 집회장으로 사용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순국선열추념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을
추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다. 추념탑의 중앙에는 태극기를 음양각한 조각상이 높이 22.3m로
축조되었으며, 태극기는 전국 14개도 전역에서 나타난 민족의 드높은 독립 의지와 기상을 상징한다.
3·1독립선언문이 새겨져 있으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들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