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창 우록에 녹동서원이 있습니다. 복음10회3 가정이 함께 구경을 갔습니다. 임진왜란때 투항한 왜장의
후손들이 사는 곳이라 그냥 지나쳤는데 오늘은 칼치치게와 구이로 점심을 먹고 녹동서원에 구경을 갔습니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좌선봉장으로 참전하였다가 조선에 귀순하였다.
이후 조총제작 기술을 전수하고 경주, 울산 전투에서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성과 이름을 .
하사받았다 이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당시에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낙향하여 향리교화에 힘썼다.
고향을 그리며 고향딸 일본을 향해서 지은 향양문.
녹동서원은 임진왜란때 귀화한 삼란공신(이괄의 난, 병자호란 ) 모하당 김충선(일본명:사야가)을
추모하기 위해 정조 13년(1789)에 건립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 되었습니다.
그후 1914년에 중건하였으며 1971년에 기존위치에서 좀 떨어진 현위치로 옮겨 증축했다고 합니다.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인이라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는 일본인에게 더 알려진 곳 입니다.
역사공부와 체험장으로 만들어 놓은 한일우호관은 녹동서원에 있습니다.
한일 교류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과 충효예절관, 3D영상실 등이 있으며
특히 예절교실은 관광객을 위한 한일 문화교류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으로 표기하는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일본인 방문객
들과 왜군 장군출신의 후예들을 배려한게 아니가면서 이해 할려는 마음으로 봅니다.
요즘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일본장수가 전쟁 중에 적국인 조선에 귀화를 요청해 면죄부를 받고 경상도
우록 에 정착해 일가를 이루었다는 것은 관심이 될 만한 일이다. 영화 ‘명량’이 관객몰이를 한것을 보면
우리 가슴에는 아직까지 일본에 대한 억눌린 감정을 풀 길이 없음을 가늠할 수 있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태도는 우리의 공분을 일으키게 십상이다. 일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 속 섬나라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왜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다가 아래 사진을 보고 이해를 합니다.
김충선 장군의 글중 오른쪽 페이지 세번쩨줄에 이순신 장군과 또 오른쪽 두번째줄에
홍의장군과의 서신을 주고 받으며 조총기술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하니 놀랍다.
임진왜란이후 선조로 부터 사성김해김씨와 이름을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이곳의 지방 지명이 우록인지라 우록김씨라고도 약칭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일본명 사야가로 나온 책들이 있다고 합니다.
삼란공신(三亂功臣)모하당(慕夏堂)김충선(金忠善) 장군
다예교실
일본장수 사야가와 조선장군 김충선의 모습을 함께 전시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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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 장군 신도비
10.26당시 법무부 장관을 지냈던 김치열씨가 이집안의 자손입니다.
김치열씨가 기중한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