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미국과 베트맹의 파리 종전 협정으로 캄보디아 내 베트맹군이 철수하고 1973년 미국의 공산게릴라기
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중폭격으로 크메르 루즈 공산게릴라군은 잠시 주춤거렸으나 이후 베트남에 주둔했던 미
국군이 철수하자 공격을 가속하여 마침내 1975년 4월17일 프놈펜에 입성하였다. 이후 그는 공산혁명 정권의 최
고 지도자들은 캄보디아 현대사의 비극을 연출하였다. 3년7개월간의 통치기간중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만행을
그는 그의 민족에게 저질렀던 것이다. 그의 집권 3년 8개월 동안 캄보디아 인구 200만명이 학살로 사라졌다. 국민
5명 당 1명 꼴이다. 그 후 베트남의 침공으로 크메르 공산당이 북쪽 산악지역으로 물러가며 그도 역시 그때부터
산악에 묻혀사는 은둔생활과, 간혹있는 게릴라 전으로 활동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고, 현대사의 새로운 비극을
연출했다. 태국 국경의 한 정글 지역 에서 이름도 없이 생을 마감하였다.
프놈펜에서 13킬로 떨어진 청아익(choeung ek)은 원래 롱간나무가 자라던 아주 외지고 평화롭던
들판이면서 중국인들의 공동묘지였던 곳이란다. 묘지의 흔적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양민을 학살한 간부들이 입었던 옷이라고 합니다.
1975년부터 시작된 크메르 루즈 정권 시절엔 프놈펜의 토울슬랭 감옥(Toul Sleng Prison)에 감금된 채
잔인한 고문에 시달리던 죄없는 캄보디아 국민들을 밤마다 트럭에 실어 나른 다음, 좋은곳으로 이동한다고
말하고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집단학살을 하고 매몰한 장소로 바뀐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유골로 채워져 있는 기녑탑
청아익을 뒤로하고 시내로 나와서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고문박물관 이라니. 투슬렝 고문박물관은 원래 여학교
였던 장소를 크메르루즈군이 사람들을 감금하고 고문했던 감옥으로 개조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토울슬랭 감옥(Toul Sleng Prison)에는 죽은자의 사진이 남아 있다. 투슬렝 고문박물관은 3개의 건물로 되어
있으며 건물 내부가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으며 당시 희생되었던 희생자들의 사진과 함께 킬링필드에
대한 설명이 있다.
당시 사람들을 감금하고 고문했던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더 보기가 어려울 만큼 마음이 아프다.
점심먹기가 어려울거 같아 근처의 왕궁을 보고 마음을 안정 시킨다.
프놈펜에서 3시간 반을 달려서 깜봇에 도착하고 6키로를 달려 썽까에 교회에 도착합니다.
놀이기구가 있으니 아이들이 금요일인데도 남아 놀고 있었습니다.
썽까에 교회를 처음 건축하자고 제안한 박욱배 집사, 이윤화 권사님의 모습입니다.
썽까에 교회 전경 곧 해가 질려고 합니다.
교회에 모여 놀고 있는 아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저녁식당 건물3층에 선교사님 숙소가 있기도 합니다.